여행

테시마 / 조용한 섬에서 가득 채우기

jjjunie 2017. 8. 21. 23:33

8월 21일 본격 여름휴가 2일차

테시마 자전거 렌탈샵 Karen - 점심 테시마노 마도(Teshimanomado) - 테시마 미술관 - 심장소리 아카이브 - 테시마 Seawall House - 이치고야 딸기빙수 - 다카마쓰 성터 - 저녁 잇카쿠


오전 10:45 페리로 테시마에 들어감


우선 발이 돼줄 전기자전거를 빌려야 한다.
테시마 이에우라 항 바로 앞 관광센터에서 운영하는 자전거렌탈샵에서 빌리면 전기자전거도 하루 1000엔에 탈 수 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full-booked.
어쩔 수 없이 3분 거리에 있는 사설 바이크샵 Karen에서 2000엔에 빌렸다. 오전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종일 타는 데에 2000엔이니까 괜찮은 편. 우리는 정오에 예약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디스카운트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이 있다면 전동스쿠터도 빌릴 수 있다. 스쿠터는 half-day요금제도 있었다.



자전거 빌리자마자 지도로 미리 봐둔 Teshimano Mado(테시마의 창문)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쿠뮤지엄이라는 곳 바로 옆이다. 조그만 시골집을 식당으로 쓰는데, 마당이었을 공간에 식사 테이블을 뒀다. 본래 뚫려있던 곳에 슬레이트 지붕을 높게 달고 벽을 세워서 실내로 만든 셈이다. 아마도 마루바닥이었을 곳에 카운터가 있고, 그보다 안쪽에서 음식을 내온다.

출입문 역할을 하는 네모난 두 벽을 통해 시골 풍경도 액자 속 그림처럼 이 공간으로 들어온다. 빛, 시골의 푸른 빛.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 은근히 풍겨오는 이 집에서 직접 만든 스콘과 감자빵 냄새. 혼자 점심밥을 먹고서 책을 꺼내 읽던 남자도 그 풍경에 녹아들었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손님 세네 명 정도가 있었지만 거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용하고 참한 인상의 여성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닭카레정식과 냉소면정식을 각자 먹었다. 정갈했다. 내가 먹은 냉소면정식은 아삭한 식감의 이름모를 야채(언뜻 브로콜리 머리처럼 생긴)와 참치를 버무린 반찬과 함께 나왔는데 국수와 아주 잘 어울렸다. 닭고기무침 반찬도 함께 나왔지만 내겐 간이 너무 쎘다. 남부지역이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음식은 짜다.

테시마에 가는 길은 잘 닦여있지만 오르막이 많아 힘들었다. 게다가 늦은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 구불구불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니. 전기자전거가 필요했던 이유다. 조금씩 숨이 차오르면서 '힘들다' 싶을 때 왼편으로 간간히 수평선이 보였다. 뜨거운 햇볕이란 변수만 아니라면 기꺼이 달릴 수 있게 만들 만한 광경이었다.
길은 대체로 찾기 어렵지 않게 하나로 나 있는데, 중간에 몇몇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들면 조금 헤맬 수 있다. 우리도 거의 다 왔을 때즈음 오르막으로 잘 가던 길을 다시 비탈로 내려가느라 조금 돌아가야 했다. 그치만 비탈에 들어선 순간 페달에 손을 안 대도 알아서 굴러가는 자전거, 쏟아지는 초록빛, 코너를 돌면 들이닥치는 바다!
이걸 위해서 고생고생하며 올랐구나 달콤하기도 하고, 결국 이걸 위해 다들 고생하는 거구나, 이 정도라면 고생 쯤이야 조금 더 할 수 있겠다, 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성취라면 성취랄까!



테시마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정신줄을 놓으면 쓰러질 수도 있을 만큼, 온 몸이 축축했고 목이 탔다. 풍경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바로 티켓오피스에 들어갔는데, 출구가 다시 바다를 향해 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봐도봐도 예쁜 하늘과 초록빛 풀과 바다. 여름빛 아래에서 초록은 연두색으로 빛났다. 특히 테시마의 계단식 논이 바다와 접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의자에 앉아 장관을 좀더 봤어도 좋으련만, 이미 더위에 지칠대로 지쳐있던 터라 엄두가 잘 안났다. 소은언니는 자리를 잡고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난 일단 그늘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테시마 미술관 구성은 단촐하다면 단촐하다. 티켓오피스에서 미술관 본관(?)으로 빙 두른 짧은 산책로가 있고, 미술관을 돌아본 뒤, 작은 카페가 나온다. 그치만 이 간단한 미술관은 건축 자체로 예술이기 때문에, 이곳에 위치해있음-이곳에 지어져있음으로 인해 보이는 것-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계단식 논이 보이는 풍경을 지나 짧은 나무그늘을 지나면, 바다가 펼쳐진다. 비스듬히 바다에 떠있는 항구도 아마 작품이 아니었을지.

새소리를 듣다가 조금더 나무그늘을 지나면 드디어 본 작품이 나온다. 사진촬영이 금지돼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거대한 하얀 무덤 같기도 하고,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 같기도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탁구공 크기 정도의 하얀 공이 드물게 놓여있다. 그리고 물이 굴러다닌다. 말 그대로, 흐른다기 보다 굴러다닌다. 바람이 불면 물방울과 물방울이 합쳐져서, 어느 정도 커지면 근처의 더 큰 웅덩이로 가 합쳐진다.
이 '무덤' 안에서 인공적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물과 움직이지 않는 탁구공들, 사람외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텅 빈 공간이다.
대신 천장에 뚫린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다시 공간을 가득 채운다. 한쪽 구멍은 하늘을 향해 나있어서 구름과 하늘이 보이고, 빛이 보인다. 또다른 구멍은 나무들을 향해 있어 역시 푸른 빛이 들어온다. 또 구멍은 바닥에 제 몸만한 빛 웅덩이를 만든다.
사람들은 빛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또는 그 안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둥글게 거닐기도 한다. 사실 빛 웅덩이 안에서 물웅덩이들이 드문드문 만들어지는 중이라 들어가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자로 누운 사람, 옆으로 팔을 괴고 누워 물방울을 바라보는 사람, 빛 웅덩이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서 있는 사람.... 사람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공간을 한바퀴 돌아보았는데, 내 머리가 닿을 만한 가장자리 쪽에선 내 머리 위에서 새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음 열심히 묘사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다 무색할 정도로 공간은 넓고, 무엇보다 압도적이다. 

텅 빈 공간이 어쩐지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모든 면에서 온전히 공간, 물, 빛, 자연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자동차를 타고 왔다면 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고된 육체노동 뒤에 이렇게 포근하고 압도적인 곳에 몸을 들여놓으니 황홀했다. 그대로 몇 시간이고 누워서 자고, 책 읽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는 작은 테시마미술관인 셈이다. 마실 것과 요리도 팔고 있었다. 기념품도 있는데 마음에 끌리는 것은 없었다.

머문 것은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다시 페달을 밟고 테시마 미술관을 떠날 땐 아쉬움이 컸다. 안녕!!! 외치며 떠나야 할 지경이었으니까. 처음 카가와에 와보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도 이 테시마미술관의 사진을 본 것이었는데,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보지 않으면 이 기분은 느낄 수 없다.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있지 않아, 지도를 보고 내키는 곳으로 향했다. 섬의 동쪽 끝편에 있는 <심장소리 아카이브>가 미술관에서 가까워 가보았다. 별 것 없었다. 무지하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본 오사카의 한 남성이 녹음해둔 심장소리를 암실에서 듣는다. 심장박동에 맞춰 램프가 켜졌다 꺼졌다 하는데, 생경한데다 어두워서 나는 무서워 1분도 채 머무르지 못했다.

청취실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녹음해둔 사람들의 심장소리 아카이브를 들어볼 수 있다. 무작위로 한국, 핀란드 따위의 나라를 넣어서 클릭해 여러 가지 들어보았는데, 사람마다 심장박동이 달랐다. 그냥 쿵-쿵- 하고 뛰는 줄만 알았는데, 나름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는 심장도 있었고, 소심하게 콩닥콩닥 뛰는 심장도 있었다. 이 아카이브, 음악하는 사람들한텐 꽤나 영감을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심장소리아카이브 바로 앞은 해변이다. 해수욕을 할 만한 곳은 못 되어보였지만 바베큐를 굽는 가족도 있었고, 바닷가까지 나가 조개 따위를 줍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시 자전거를 달려 항구 쪽 이에우라 지역으로 돌아갔다. 'La foret de murmur'라고 이름 붙은, 침묵의 숲이란 곳에 가볼까 했는데 다시 산을 타야할 것 같았고 그러기엔 시간적 여유도 많지 않아 항구 근처에서 볼 만한 곳을 가보기로 한 것.

Teshima SeaWall House는 역시 해변에 있는데, 다다미방에 드럼, 색소폰 등등 연주음악이 나온다. 바다를 향해 난 액자같은 창으로 풍경도 볼 수 있다. 다만 바로 옆집에서 포크레인으로 신축 공사를 하고 있어, 음악을 듣기엔 공사 소리가 방해됐고 풍경을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땀이나 식힐 요량으로 방에 우리 둘만 앉아있었는데, 관람객을 받던 할아버지가 <비가 올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영문을 몰라 나가라는 것인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밖으로 우릴 이끌더니 비가 올 것 같다고, 우산이 있느냐고. 정말 그새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오후부터 들리던 천둥 같은 소리도 한층 가까워져있었다. 섬 주민인 할아버지의 선견지명(?) 덕에 일단 우리는 항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노인들의 이야기도 하고픈데. 장수국가로 이미 알려진 일본이지만 볼수록 새롭고, 우리나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다카마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입국 수속을 도와주는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입국, 세관 심사야 젊은 직원들이 하지만 입국심사에 필요한 카메라 촬영이나 지문 인식 등 안내원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었다. 그들이 없어도, 기계가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하므로 공항 운영에는 아무 차질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서서 <안녕하세요> 한 마디씩 해주고 있었다. 그들이 그 일로 얼마를 받는지, 뭘 하던 사람들인지 모르겠찌만 사람의 쓸모를 만들어주는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줘야 한다.


항구로 가는 길에 있는 이치고야(딸기 디저트 전문점)에 들러서 빙수를 하나 시켰다. 일반 컵 만한 크기에 다시 컵만한 얼음을 가득 갈아서 준다. 맛은 얼음+딸기잼? 시원하게 먹을 만했다.
먹는 동안 먹구름이 짙게 내려앉고 바람이 불더니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외국인 여행객 서너 명이 가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기도 했다. 우리는 소나기 같은 비가 멎기를 기다릴지, 비를 맞으면서 항구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오는 길에 탔던 테시마-다카마쓰 페리는 70인승 정도로 규모가 작았던 데다가, 오후에 나가는 배가 많지 않아서 표가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일단 멀지 않은 거리이니 나가보기로 결정.
이치고야에서 자전거 렌트샵까지 코앞이어서 일단 자전거를 반납하고, 그곳에 쌓여있던 우비를 입고 항구로 갔다. 좀 비를 맞았는데, 이에우라 항에 도착해서 바깥을 보니 이리도 뽀송뽀송할 수가. 비는 금방 멎었다. 그치만 모처럼 비도 맞고, 비를 맞을 때면 떠오르는 영화 클래식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노래도 흥얼거릴 수 있었다.

돌아오는 배에는 노곤함이 깔려있었다. 자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는 조용히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돈 계산이나 다음 갈 곳을 찾아보았다.
식사 담당(?)이 된 소은언니가 찾은 잇카쿠라는 식당에 가기로 했다. 우리 숙소와 항구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걸어서 이동하기에 충분했다.

다카마쓰 항구 앞에는 다카마쓰 성터가 있다. 나는 사전에 정보가 없었는데, 현소니가 블로그에서 보고 한 번 가보자고 했던 곳. 7시면 공원 문을 닫는데 마침 6시 정각을 가리키던 터라, 밥 먹기 전에 한 바퀴 돌자 하고 들어갔다. 일본식 정원인데 잘도 꾸며놨다. 망루에 올라가서 본 석양도 멋있었다.



저녁은 잇카쿠. 50분 정도 줄 서서 기다림. 일 마치고 회식하러 온 회사원들, 어린 딸이랑 외식하는 가족, 2:2 데이트라도 하는 것 같았던 남녀 중고등학생, 집앞에 술 한잔 걸치러 온 것 같은 아저씨들, 그리고 우리 한국인 여행객 등등 ㅎㅎ 말 그대로 남녀노소 즐기는 식당. 이 시간 다카마쓰에서 가장 핫한 식당이 아니었을지 ㅎㅎ 종업원들도 친절.




밥 먹으면서 언니와 '매일을 기록할 것' 이야기 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지나쳐버렸던 요즘 매일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기록했다면 내게 어떤 자산이 됐을까, 하는. 한국에 돌아가면 일에 치인다는 핑계는 제쳐두고 매일 일기를 쓸 것이라고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