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일주일 전 갑작스럽게 정해졌던 제주행.
갑작스러웠음에도 머무른 곳(잔 곳, 본 곳, 먹은 곳) 등등 모든 공간이 다아 좋았다. 제주에 갈 때마다 다시 겪고 싶은 것들 투성이라, 오랜만에 여행 기록이란 것을 남겨본다.
제주 출장 일정이 생긴 남편이 5월 황금연휴에 주말을 붙여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일 하던 중(=점심 먹던 중) 남편 카톡을 봤는데, 당장 답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만 5년, 남들 쉴 때 일해야 하고 쉬고 싶을 때 맘껏 쉬지 못하는 일상이 익숙하면서도 점점 불편해진다.
지금까지야 직무 특성상 응당 그래야 한다, 그래야 남과 다른 의미있는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있었다. 그치만 현실에 부딪칠수록 뿌듯함보단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란 회의감이 커지기도 하고. 거기다 회사를 위해 나와 내 주변을 포기하는 바보가 되고 싶진 않다는 사고방식, 직장문화가 퍼지고도 있고.
후자의 생각이 깊어져 이직하는 선배들을 심심찮게 봐왔는데, 나 역시 그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쉴 때도 일을 놓지 못하던 초년생 때에 비해 지금은 그래도 전원 차단하듯 일과 쉼을 분리하고는 있지만, 그런 방식이 익숙해질수록 일을 해야할 때에도 더더욱 쉬고만 싶어지는 회사원 마인드.
여튼간에 이번엔 운좋게도 연휴 중 하루만 빼고 4일 연속 쉴 수 있었다. 코로나 탓에 킵해두었던(태국 끄라비, 잘 있니?ㅠㅠ) 겨울휴가 이틀치도 남아있었다. 마침 편집국 전반적으로 봄 휴가(연차 중 3일)를 써야 하는 타이밍이라, 5월 말에 남은 휴가를 몰아쓰려던 계획에서 하루를 떼어 이때 쓰기로 했다. 흔쾌히 '쉴 때 쉬라'고 해준 팀장 최선배와 맡은 바 빵꾸만 안나면 쿨한 노부장에게도 감사한 일.
출발 전날 밤샘 당직 근무였지만, 그깟거 걸림돌 축에도 끼지 않는다. 나는 새벽에 퇴근하자마자 회사에서 출발 남편은 미리 싸둔 짐을 챙겨 집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하고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극성수기였지만, 코로나 와중에 특수를 맞은 항공사들이 부지런히 항공편을 늘려놨다. 2인 왕복에 40만원.
우리보다 열흘 뒤에 떠난다는 친구네 커플이 불과 22만원에 예매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됐지만,
나야 뭐 원체 버는 만큼 써버리는 이 시대의 노동계급이니까.
별담스테이 : 네이버
N예약 리뷰 38 · ★4.84 · 매일 00:00 -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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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 일정. 남편은 하루 정도는 완전히 일만 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동안 자유 일정을 보내는 것으로 하고, 그 외엔 가급적 같이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숙소는 남편이 업무볼 곳(=대표네 집)과 가까운 애월읍 언저리여야 했다.
황금연휴 일주일 전 웬만한 숙소는 다 예약이 차있었는데, 애월 근처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숙소가 '별담스테이'였다. 네이버플레이스 별점 평도 매우 좋았다.
첨에 남편은 수영장 있고 깨끗한 호텔을 원했지만 난 모처럼이니 자연 속에서 푹 쉬고 싶었다. 게다가 어느 방문객이 남긴 '사장님이 친절하고 조용하고 깨끗하다'는 후기도 눈에 띄었다.
따뜻한 사람이 성실하게 관리하는 공간, 주인장의 손길이 이곳저곳 닿아있는 공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에어비앤비에 올라있는 별담스테이 주인장의 자기소개는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 같아 더 호감이 갔다.
최근 출간된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그림책이 뭇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걸 보면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한가보다. 이 책과 관련해 봤던 문구 같은데, '좋아하는 게 많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어떤 짧은 글에 마음이 끌렸던 것을 보면, 내가 별담스테이를 찾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것 많은 주인장의 취향이 물씬 느껴지는 공간.
제주를 여행하다가 제주에 반해 제주도민이 된 지 벌써 3년이네요.
그림 그리기와 바느질을 좋아하고 집 꾸미는 게 취미였는데, 제주에서 집을 꾸미고 손님을 맞으며 좋아하던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서울과 대전, 일산에서 평생을 살았고 이제는 제주의 하늘과 별, 바다. 오름을 좋아합니다.
그냥 스쳐가는 인연이 아닌 좋은 분들과 좋은 만남을 기대합니다.
- 별담스테이 호스트 소개글
방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없는 것이 없었다. 욕실 수건과 세면도구, 부엌 조리도구와 식기도 빠짐없이 넉넉했고. 냉장고도 있었고.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지도책이나 방문객 방명록도 있었다.
4일간 묵으면서 하도 나다니다보니 정작 날 설레게했던 주인 아주머니를 마주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첫인상에서 대번에 내가 찾던 그분이란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체크인할 때 제일 먼저 들은 소식은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수도 문제가 있어서 오늘 저녁까지는 수압이 약해 샤워하기 어려워요'라는 이야기였는데, 전날 밤샘 근무하고 바로 제주 날아왔던 터라 빨리 씻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에... 뜨악 했다. 그치만 그런 말조차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건네시니까, 뭐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다른 것보다 참 인상 좋으시네,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더랬다. (졸졸 나오는 물로 겨우 씻긴 했다.)
머무는 동안 한두번인가 마주쳤을 땐 늘 "수건은 부족하지 않아요?" 같은 말로 불편함이 없는지 물어봐주셨던 기억이 난다.
이 숙소의 특장점은 아기자기하고 운치있는 정원. 두 가지 크기의 고무신을 둔 것도 귀엽다. 정원을 바라보는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 그늘이 있는 테라스 자리도 마음에 쏙 들었다. 나무 데크가 있어 맨발로 나가도 되었다. 볕이 잘 드는 방향이어서, 아침에 비가 온 뒤라도 맑게 갠 오전에는 데크가 바싹 말라있었더랬다. 발바닥에 닿는 나무의 온기가 포근했다. 이렇게 집을 지은 주인장? 건축가?의 세심함도.
정원은 세 방이 넓게 공유한다. 테라스 사이에 작은 벽은 있지만 공간이 뚫려있긴 하다. 문을 열어놓거나 밖에 나가있으면 옆방 소리가 들릴 수도, 옆방에 내 소리가 전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즈넉한 곳에선 마음도 고즈넉해지는 법이라, 소음 등의 매너는 알아서 지키면 될 일. 테라스로 나가는 문은 이중창 샷시라 문을 닫는다면 조용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풀밭 정원이 있다보니 벌레가 없지 않았다. 다만 우리를 공격하는 벌레라든지 심히 징그러운 벌레는 없었다. 하루는 동문시장에서 저녁 먹을거리를 사다가 밤중 테라스에 펼쳐놓고 먹기도 했는데 크게 불편했던 기억은 없다. 아마 여름철이라도 따로 관리를 하실 테니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